독립운동 자금 된 ‘국민 소화제’…129년 활명수에 담긴 민강 선생의 정신 [창업주의 비밀노트]

허백윤 기자
수정 2026-09-21 11:00
입력 2026-09-21 11:00
국내 첫 신약·최장수 의약품 동화약품 ‘활명수’
창업주의 독립운동 이어 독립·민족기업 DNA
속이 더부룩할 때 손쉽게 찾는 소화제, ‘활명수’가 내년이면 출시 130년이 됩니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을 담은 활명수(活命水)는 국내 최초의 신약이자 최장수 의약품이죠. 그 시작에는 조선시대 말과 일제강점기 어려움 속에서도 건강한 국민과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활명수는 1897년 궁중 선전관이던 민병호 선생이 궁중에서만 알려진 생약의 비방을 활용해 현대식 액체 소화제로 처음 개발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이죠. 민병호 선생은 아들인 민강(1883~1931) 선생과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을 창업해 대중화에 나섰습니다. 당시에는 민중이 급체나 토사곽란 등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아 활명수는 고통받던 백성들을 구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습니다.
동화약방의 초대 사장이 된 민강 선생은 1901년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습니다. 회사를 독립운동의 국내 연락망 및 자금 통로로 내주었고 활명수를 판매한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으로 이동할 때 활명수를 휴대해 현지에서 판매하고 그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하도록 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한성임시정부 수립 운동에 참여해 국민대회 개최를 추진했고, 이때 동화약방을 거점으로 두고 준비 자금을 마련하는 활동을 맡기도 했습니다.
민강 선생은 이후에도 동화약방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 거점(서울 연통부)으로 쓰도록 하며 국내외 독립운동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출옥 직후 최익환·전협 등이 조직한 대동청년단에 가입한 그는 1919년 10월 31일 일왕 생일에 맞춰 서울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열기 위해 학생단체들을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만세운동이 연기되고 이들의 움직임이 사전에 발각되며 당일 새벽 일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이 일로 1920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다음 해 징역 1년으로 감형됐습니다. 그러나 옥고를 치르다 건강이 나빠져 다음 해 1월 가출옥했습니다.
치료를 받으면서도 동화약방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지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24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교민단 의사회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또 독립운동가의 장례를 주관하거나 생활고를 겪는 수감자 가족의 생계를 돕고, 출옥자와 그 가족의 자립을 돕기 위한 사회사업 기관인 면수구호회를 창립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으로 헌신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죠.
1930년 당시 동화약방에 하숙하며 이화여고에 다니던 9촌 조카 민영덕의 딸 민금봉이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열린 경성 시내 여학생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수배되자 은신시켜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민 선생은 1931년 11월 자택에서 급성 뇌염으로 순국했습니다. 여러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특히 민강 선생의 독립운동 지원에는 활명수가 큰 몫을 했습니다. 당시 활명수 한 병의 가격은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과 막걸리 한 말을 살 수 있는 비용이었다고 합니다. 활명수를 판매한 돈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이 됐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으로 이동할 때 활명수를 가지고 가 현지에서 판매하고 그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답답한 속을 가라앉혀 주던 활명수가 나라를 잃은 이들의 막힌 속을 뚫어주는 역할도 한 셈입니다.
동화약방은 1936년 베를린 마라톤에서 손기정·남승룡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한 것을 기념하는 축하 광고를 신문에 싣기도 했습니다. 당시 광고에서 조선 청년의 ‘의기충전’(의지와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는 뜻)을 높이 평가하며 “건강한 조선을 목표로 하자”는 메시지를 담아 암울한 시대 국민의 자부심을 북돋고 일제 치하의 상처를 위로했습니다.
민강 선생은 교육자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1907년 서소문 밖의 초등 교육기관인 소의학교(현 동성중·고등학교) 설립에 관여했고 1918년에는 서울대 약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약학교 설립에도 참여하며 약학 교육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때 조선약학교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약사인 장금산을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민강 선생의 독립운동으로 동화약방은 많은 외압을 받고 경영이 계속 어려워졌지만 1937년 보당 윤창식(1890~1963) 선생이 인수하며 역사를 이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윤창식 선생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는데, 동화약방을 인수한 뒤 경제적 자립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조선산직장려계를 결성해 총무로 활동했고 빈민 계층을 도운 보린회와 신간회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다양한 민족 운동을 했습니다.
이후 1945년 8·15 광복과 1950년 6·25 한국전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회사 규모가 줄었다가 다시 회복되는 흐름을 거쳤고, 윤창식 선생의 장남인 윤화열(1915~2003)의 가업 승계로 서소문 본사와 제2공장 시대를 열었습니다. 1967년부터 원래의 활명수에 탄산의 청량감을 더한 ‘까스활명수’를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1973년에는 윤화열 사장의 동생인 가송 윤광열(1923~2010) 사장이 취임했는데 당시 윤 사장은 “약을 구하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며 국내 유일의 희귀약품센터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동화약품의 7대 회장이 된 윤광열 회장도 보성전문학교 재학 시절 일제에 강제 징집됐다가 광복군에 합류해 중대장으로 활약한 바 있습니다. 민강에서 윤창식, 윤광열로 경영의 주체는 달라졌지만 독립운동과 민족기업의 정신은 계속 이어진 셈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활명수의 뜻은 국경을 넘어 세계로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동화약품은 2013년 활명수 116주년 기념판 출시를 계기로 매년 활명수 기념판 판매 수익금을 물 부족 국가의 식수를 지원하는 데 기부하고 있습니다.
또 오랜 세월을 지켜온 활명수를 비롯해 후시딘, 판콜 등 국민 상비약으로 자리 잡은 약들과 함께 신약 개발과 디지털 치료제, 메디컬 코스메틱 등 다양한 분야로 보폭을 넓히며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위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동화약품은 올해 창업주 민강 선생의 평전을 내고 기업가이자 독립운동가, 교육자로 헌신한 선생의 삶을 돌아보고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는 동화약품의 역사와 가치를 재조명했습니다.
동화약품 관계자는 “민강 사장은 일제강점기 국권 찬탈의 위기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왔다”며 “민강 초대 사장의 활동들이 널리 알려져 후대에 더욱 귀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허백윤 기자
세줄 요약
- 활명수, 국내 최초 신약이자 최장수 의약품
- 민강 선생, 동화약방 통해 독립운동 자금 지원
- 구호·교육·사회사업으로 민족기업 정신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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