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 속으로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 (정태춘, ‘북한강에서’)
밤은 특별하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의미와 맥락에서 사랑하는 밤. 글을 쓰는 사람들도 대개 밤 시간을 선호한다. 어둠과 고요 속에서 말을 고르고 사유를 전개하는 일이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선생님께서도 “밤이 선생이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런데 그 밤은 파괴와 절망의 밤이 되기도 한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12월 초 밤사이 세상에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대통령이 국가계엄을 선포하고 앞장서서 내란을 조장한 것에 대해 제일 먼저 분노와 수치심이 고개를 들었다. 혼란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사이 밀려드는 절망감 속에서 머리보다 먼저 손가락이 작동해 튼 노래는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으로 시작됐다.
한국어가 망가지고 있다. 민주주의와 평화, 사회 정의와 미래 같은 단어들이 사람들의 입속에서 똑같이 흘러나오지만 서로 다른 입장에서 다른 의도를 갖고 마음대로 사용되고 있다. 말은 시공간을 연결하고, 사람을 연결한다. 시인으로서 나는 말이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믿는다. 사람을 이끌고 사회를 이루는 말들은 달라야 한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 지시적인 말, 그리하여 특정인들의 욕망만을 충족시키려는 발화에는 자기 고민이나 반성이 없다. 다른 사람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역사와 미래가 안중에 없다. 의미 이상의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자신 안의 또 다른 자기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존재만이 사람이다.
밤은 중상과 모략의 시간이 되기도 하는 것일 테다. 누군가 관례를 뒤집고 다른 방식으로 구속일수를 계산하고, 그에 따라 구속 취소 결정을 내린 법원은 국민의 마음속에 또다시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법치주의를 희석시키고 정의를 꺾이게 하는 계산은 맞아도 틀렸다. 구속 취소가 법적 판결과는 별개라 하더라도, 즉시항고 절차를 통해 재구속된다고 해도 암중 모략 속에서 가능했던 계산은 우리 마음속에 깊은 불신과 허탈감을 불러일으킨다. 탄핵심판 선고를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길다.
마음에는 오지 않는 봄이 저 혼자 성큼 뿌연 먼지와 함께 대기를 덮고 있다. 봄밤은 시인들의 것이다. 그런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수 있는 평온한 세상이 아니다.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속이 시끄러워 글을 한 줄도 쓸 수가 없다.
말과 글뿐이랴.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의 밤과 봄이 무너지고 있다. 밤 시간을 노리고 눈을 번뜩였던 자들, 국가를 유린하고 국민을 기만한 자들이 망가뜨린 봄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