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20>경복궁 근정전 천장의 용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수정 2015-06-15 15:42
입력 2015-06-04 17:48
龍의 입에서 ‘만물의 근원’ 물이 쏟아진다
용의 본질을 모르는 것은 물론 용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지 않았고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기와 연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관련된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여서 미술사학 연구는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술사학은 주로 역사적 접근만 했지 조형 원리나 사상사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그런데 필자가 조형언어를 처음으로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사와 종교학에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사와 종교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조형예술을 잘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관심 갖는 분은 거의 없었다. 사상사를 열심히 공부하고 종교란 무엇인가 생각해 와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작품들을 관찰-기록-스케치-촬영-논문 작성 등의 과정을 열심히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조형예술이 오히려 사상사와 종교학을 도울 수 있거나 보완하거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미술사학은 기록의 오류에 일그러진 사상사와 종교학의 원형을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으므로 이 연재는 미술사학은 물론 문화사와 사상사와 종교학을 함께 다루고 있는 셈이다.
기와에 조각된 용의 입에서 영기문이 나온다고 앞의 글에서 밝혔고, 영기문이란 ‘생명이 생성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조형’이라고 말했다. 인류의 학문에서 여러 가지 주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즉 이 연재에서 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생명을 다루고 있다는 말과 같다. 물은 만물생성의 근원이고 철학의 시작이다. 물은 문명은 물론 사상도 낳는다. 탈레스처럼 물이 모든 물질의 본질이라는 데 기초한 우주론과 노자(子)처럼 물의 속성이 도(道)이고 만물생성의 근원이라는 우주관은 서양의 그리스와 동양의 중국에서 기원전 5~6세기에 이미 제기됐다. 바로 그 우주생성론의 중심에 용이 있다.
그러면 용의 입에서 나오는 영기문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바로 ‘물’이다. 물을 간단히 가시화한 것이 제1영기싹이고 물이 흐르는(전개하는) 모양이 연이은 제1영기싹, 제2영기싹, 제3영기싹이다. 둥근 수막새에는 본질이 같은 연꽃과 용이 새겨질 수 있고, 곡선을 지은 긴 암막새에는 갖가지 긴 영기문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연화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따로 다루기로 하고 이해하기 쉬운 용의 입에서 물이 나온다는 조형을 좀 더 다루어 보기로 한다. 제1영기싹이 물을 상징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필자다. 끝이 도르르 말린 조형은 식물에도 있고 동물에도 있지만, 그 조형에 ‘제1영기싹’이란 명칭을 부여한 것은 형이상학적인 조형이기 때문이다. ‘대생명의 싹’이라는 차원 높은 상태에서 말한 것이다. 즉 물을 조형화한 것이 제1영기싹이며, 용은 다양한 보주와 제1영기싹으로 구성돼 있다는 진리는 이미 증명했지만 깨닫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린다.
공주 주미사 출토 암막새 영기문을 다시 확대해 보기로 한다 ①. 용의 입에서 이렇게 제1영기싹들이 연이어 다발로 나온다는 것은 용의 입에서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상징한다. 귀면이라든가 당초문이라 알고 있으면 엄청난 진리를 보지 못하니 우리는 바로 그런 것을 허상이라 부른다. 잘못 보면 허상이 되고 올바로 보면 실상이 된다. 우리는 교육을 평생 받으며 실상을 보지 못하고 허상만을 보고 성장해 왔다. 아직도 용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이 계시다면 다른 예를 보여 드린다. 항상 주미사 기와에 보이는 조형을 조각으로 만들 수는 없을지 생각해 왔다.
10년 전 매일 궁궐 건축을 열심히 조사하던 중 사진기로 경복궁 근정전 천장을 찍는데, 아득히 높은 중층(重層) 궁전의 높은 천장이어서 두 용이 회전하는 조형, 즉 우주에 대생명력이 순환하는 조형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②. 곧 망원렌즈를 사서 다시 찍어 보니 여전히 입에서 하얀 것이 나오는데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③. 그래서 얼굴 부분을 잘라 크게 확대해 보았다. 순간 깜짝 놀랐다. 옥으로 만든 것인데 끝이 제1영기싹 세 가닥 다발이 아닌가. 용의 입에서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④⑤. 그날은 너무 기쁘고 흥분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2015-06-0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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