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0) 진보적 신학자 이반 일리히
수정 2011-10-31 00:00
입력 2011-10-31 00:00
세속화된 교회 권력에 맞선 또 하나의 ‘예수’
1992년, 이반 일리히는 암 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인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요가 같은 자기 수양으로, 고통이 극심할 때는 생아편을 피우면서까지, 최선을 다해 통증을 감당해냈다. 일리히에게 병은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시련”이었고, 삶이 준 선물이었다. 그는 병을 얻음으로써 새롭게 열리는 세계에 대한 숙고가 우리의 삶을 고귀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몇 분 몇 초밖에 남지 않았을지라도, ‘안녕’이라는 작별 인사를 온전히 자기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일리히는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고귀해지는 길. 그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간 이 시대의 현자, 이반 일리히(1926~2002).●오스트리아 태생… 철학과 신학 공부
일리히는 교회를 ‘그녀’(she)와 ‘그것’(it)으로 구분해서 불렀다. 전자는 “개개인이 따로 또는 함께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의 삶을 이어나가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 모습을 간직한 교회였고, 후자는 “사랑을 세속적으로 만들고 진실한 믿음을 강제화하는 제도화를 통해 삶을 타락하게 하는” 세속화된 교회였다. 그는 둘 중 ‘그녀-교회’에, 즉 권력 없는 ‘어머니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머물고자 했다.
일리히는 로마교회의 관료제도를 뒤로한 채 미국으로 떠난다. 당시 뉴욕은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들로 넘쳐났고, 일리히는 그들이 사는 지역의 사제직을 자청했다. 그러나 기존의 천주교단은 이주민들을 새로운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리히는 분개했고, 교회에 이들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1956년,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 대학교 부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일리히의 문제의식은 확장된다. 그는 학교라는 제도가 ‘경제성장’ ‘진보’라는 말로 포장된 자본의 배타적 경쟁 논리를 이식하고, 사람들에게 “의무교육을 마치지 못했다는 내면의 죄의식까지 새로 짐 지우는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일리히는 ‘교육’이라는 말 속에 계몽자가 수동적인 수혜자를 구원한다는 의미가, 서구 근대 문명에 기독교식 구원의 논리가 깔려 있음을 발견한다.
1960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 한 달 전, 푸에르토리코를 장악하고 있던 두 명의 가톨릭 주교가 사제 권력을 남용해 정치에 개입하는 일이 벌어진다. 일리히는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이 일로 추방된 후 멕시코로 건너가 국제문화형성센터(CIF)를 창설한다. 이를 1966년에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로 전환하고, 일리히는 여기서 주류적 흐름에 반하는 대항-연구와 지식운동을 전개해갔다.
일리히 말대로, 교회는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정치수단”이 되었고, 교황은 “현대의 개발 경제학이라는 전제 위에 복음주의적 문장을 처바르는 기회주의자”로 전락한 것이다. 일리히는 세속화된 교회권력에 대항하는 운동을 전개해갔다. 기존의 가톨릭 사회에서 일리히는 ‘이상하고 불성실하고 미덥지 못하며 국적을 알 수 없는 사람’ ‘호기심 많고, 교회를 곤혹스럽고 떠들썩하게 하는 눈엣가시’였다. 1967년, 교황청은 미국 정보부(CIA)의 보고서를 도용해 그를 소환하고 심문했고, 침묵으로 저항한 일리히는 결국 파문당했다. 이제 일리히는 신부로서의 공식 임무를 버리고, 새로운 배움과 실천의 길을 찾아 떠난다.
●구원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일리히는 세미나를 조직해 공부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으며, 푸에르토리코에서 품었던 질문을 정교화했다.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에는 활발한 저술과 강연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가 전하는 새로운 ‘복음’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네 편의 팸플릿, ‘학교 없는 사회’(1971) ‘성장을 멈춰라’(1973)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1974) ‘병원이 병을 만든다’(1976)는 건강, 죽음, 교통, 배움, 사랑과 같은 삶의 보편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좋은 삶을 위해 우선은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하며, 그 제도에 의존해서만 잘살 수 있으리라고 착각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은 잘 곳 없는 나그네들에게 기꺼이 잠자리를 내주고, 먹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전해주는 자발적 실천행위였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는 많은 제도가 필요치 않다. 우리는 최소한의 소유와 행위만으로도 복음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제도의 서비스를 구하지 말고, 스스로 자발적인 환대능력을 키워라! 일리히가 존경했던 12세기 수도사 성 빅토르 휴그의 말처럼, 구원은 나 자신과 “내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는” 것이지 제도로부터 오는 게 아니었다. 일리히는 교회 제도와 계몽에 의해 인간을 구원하려는 오랜 기독교 전통을 폐기하고, 꺼져가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불씨를 현재에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가 내 이웃인가
1980년대 이후에는 ‘그림자 노동’(1981), ‘젠더’(1982)에서 노동과 성의 문제 등을 다루며 연구를 확장시켰다. 일리히는 역사로 눈을 돌린다. 그에게 역사는 “현재를 바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기준점”에 이르는 특별한 길이었다. 과거는 오직 현재의 경험에서 출발할 때에만 대안이 될 수 있다. 일리히는 역사와 고전을 배움의 보고(寶庫)로 새롭게 인식했다.
부단히 자신을 돌아보는 배움의 과정 없이는 다른 삶이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지혜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배움의 여정에서, 모든 사람은 누구에게나 가르칠 수 있고, 누구에게든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얻어맞아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구해주는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을 구해주는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행동하고 싶다.”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었다. 강도를 당해 반죽음이 된 유대인을 도와준 것은, 유대인들의 적이자 멸시의 대상인 사마리아인이었다.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법, 의무, 종교와 같은 제도와 무관한, 보편적 인류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일리히는 예수의 답을 평생의 질문으로 간직했다. 누가 내 이웃인가? 끝없는 배움과 실천의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던 자, 일리히는 또 하나의 예수였다.
최태람 남산 강학원 연구원
2011-10-31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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