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집을 짓다…아버지 삶을 잇다
수정 2020-06-02 01:52
입력 2020-06-01 17:28
[마에스트로와 나의 건축] 이타미 준·유이화 부녀의 디아스포라 건축
민화를 시작으로 가구, 도자기 등 고미술품이 주는 조형의 순수함과 따뜻한 온기에 빠졌다. 틈날 때마다 전국을 여행하면서 전통건축물들을 손수 도면화했다. 일본에서 ‘이조의 민화’(1975), ‘이조의 건축’(1981), ‘조선의 건축과 문화’(1983), ‘한국의 공간’(1985) 등 저서들을 연달아 출간하며 조선의 예술미를 찬미했다. 이 책들은 아직까지도 조선 건축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소중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건축가로서 ‘어머니의 집’이라는 작품 데뷔를 앞두고 성씨인 유가 일본 활자에 없어 곤란해지자 그는 ‘국제인’이 돼 살기로 결심한다. 뿌리를 찾기 위해 고국을 처음 방문할 때 출발했던 이타미공항에서 ‘이타미’라는 성을, 그리고 당시 의형제처럼 지내며 ‘요시아 준’이라는 예명으로 일본에서도 활동하던 작곡가 길옥윤 선생의 ‘준’에서 이름을 따서 작가명 ‘이타미 준’을 만들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일본경제 활황기에 서구화, 근대화를 지향하며 반짝거리는 첨단건축을 선보였던 다른 건축가들과 달리 이타미 준이 본인만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존재의 근원을 질문하는 모노하의 예술가들과 의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모노하의 대부 곽인식(1919~1988) 선생은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곽인식이라는 작가가 없었다면 지금의 이타미 준은 없다”라는 말을 종종 할 정도였다.
사물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존재의 근원에 도달하려는 모노하의 정신은 이타미 준의 작가세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소재 그 자체의 물성을 찾기 위해 의식적으로 흙, 돌, 금속, 유리, 나무 등의 소재를 콘크리트와 대비시켜 조화와 대립을 꾀했다.
이타미 준이 데뷔한 1980년대 일본 건축계는 유리와 철이 중심을 이루는 획일화된 건축이 주류였다. 그때 그는 “현대건축에 본질적인 무언가가 결여돼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체온과 야성미일 것”이란 말을 남긴다. 표현할 시대정신마저 잃어버리고 현대건축을 구성하는 건축언어조차 애매하고 뒤죽박죽인 상황은 그에게 표현할 주제의 상실이자 온기의 상실이었다. 당대의 획일화된 산업사회 시스템 속에서 반근대적인 태도로 현대건축을 실천하고자 했던 이타미 준은 “토착 재료를 사용해서 그 땅이 지닌 오래된 가치를 오늘날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면서 산업사회 이전의 조형의 순수성을 추구했다.
돌을 이용한 ‘각인의 탑’, ‘석채의 교회’, ‘M빌딩’, 그 지역의 황토를 현장에서 직접 찍어내어 만든 ‘온양민속박물관’ 등은 자체의 물성만으로 그 존재를 강하게 드러낸다. 도쿄의 아카사카라는 도시 한복판에 세워진 M빌딩에서는 깨어진 면이 살아 있는 돌을 외벽에 그대로 사용해 그 야성이 드러나도록 함으로써 “획일화된 도시의 흐름을 거역하기 위해 도시의 빈틈에 기둥이 되라는 뜻”을 담고자 했다.
“사람의 생명, 강인한 기원을 투영하지 않는 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감동을 주는 건축물은 태어날 수 없다. 사람의 온기, 생명을 작품 밑바닥에 두는 일. 그 지역의 전통과 문맥, 에센스를 어떻게 감지하고 앞으로 만들어질 건축물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땅의 지형과 ‘바람의 노래’가 들려주는 언어를 듣는 일이다.”(이타미 준·‘Architecture and Urbanism 1970~2011’ 중에서)
그는 일찍이 한국의 전통 건축이 지닌, 자연과의 조화와 환경에 순응하는 건축물에 매료됐다. 제주도를 포함한 자연을 캔버스 삼아 작업 활동을 펼치며 대지에서 인간과 자연의 매개로서 건축 역할을 고민한다. 그에게 건축은 “자연과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추구해야 하며, 공간과 사람, 자신과 남을 잇는 소통과 관계의 촉매제”여야 했다. 재료 자체가 날것 그대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풍경과 융합될 수 있고 온기가 있는 고요한 작품을 추구했다.
특히 제주에서의 작업들은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환경과 풍경에 조화를 이룰 뿐 아니라 바람이 많은 자연환경에도 순응해야 하는 건축을 강조했다. 건축 자체가 주인공이기보다 바람에 의해서 조각된 건축물로 남아 그대로 그 대지에 스며들기를 추구한 것이다. 제주도는 그에게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바닷가에 있는 마을인 시즈오카 시미즈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에게 제주의 바닷가는 말년을 보내고 싶을 만큼 고국의 품과 같은 곳이었다. 이타미 준은 “국제적이며 보편적인 세계에서 독창성이란 그 지역의 고유한 문화에서 생성된 사상이 아니면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이러한 작품들을 쏟아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단지 우연한 건축주와의 만남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긴 세월 간직해 온 제주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이해가 바탕이 되고, 오랜 세월 굳건히 다져온 건축에 대한 그의 확고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풍토, 경치, 지역의 문맥(context) 속에서 어떻게 본질을 뽑아내고 건축에 스며들 수 있게 하는지를 고려합니다. 경치와 건축이 대립해도 좋고 조화가 돼도 좋습니다. 거기서부터 발생해서 새롭게 펼쳐지는 세상을 저는 보고 싶습니다.”(통일일보 이우환 작가와의 대담 중)
이타미 준의 건축에서 시간은 공간만큼이나 중요한 요인이다. 시간의 흐름과 역사성 속에서 유효할 때만 현대에도 유효할 수 있고, 그저 단순히 이념적으로만 말하는 것은 유행에 불과하며, 시간적인 두께가 없는 현재란 시제에만 머물 뿐 정착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새로운 대지를 접할 때나 복잡한 세상에서 새로운 행위를 하고자 할 때면 그 지역의 문화성과 역사성을 배경으로 하여 콘텍스트를 현재로 이끌어 내지 않고서는 사실성을 획득할 수 없음을 강조하며, 그 땅이 내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한 신념과 정성이 있었기에 수십 년이 지난 작품에서도 사실성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나 같은 재일동포 2세들은 한국에서는 일본인으로, 일본에서는 한국인으로 늘 경계에 서 왔다. 그러나 가슴속에는 늘 태극기를 품고 살아왔다”고 가슴을 치며 이야기하시는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어눌한 한국말로 ‘조국’이라는 어려운 발음을 하실 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이 단어를 끌어내셨다.
건축 이야기를 안 하실 때면 “백자는 나의 스승”이라며 오로지 한국의 도자기 예찬만을 하셨던 분이다. 백자와 같이 따뜻한 온기를 품으며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그런 푸근함과 고귀함을 지닌 건축을 하고 싶으셨던 분이다. 그렇게 한국의 백자는 아타미 준 건축철학의 바탕이 됐고, 대지에 순응하며 겸허한 자세로 존재하는 한국의 전통건축 또한 그의 건축 철학의 근간이 됐다.
“시대 조류에 흔들리지 말고 너만의 감성을 키우고 역사 위에 서는 건축가가 되라”라는 말씀은 내게 귀한 유산이 됐다. “예순을 넘으니 이제 건축이 뭔지 알 것 같고, 일흔이 넘으니 나만의 오리지널리티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 분. 일흔살까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는 현재대로 복잡성이 일상화됐고, 그것이 오히려 장르가 돼 가는 이 시대에 나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찾기 위한 노력은 매우 쉽지 않지만 멈출 수 없는 소명이다.
더이상 도시엔 그 지역의 문맥이나 지역성 따위를 찾아내기 힘들다. 그러나 아버지가 건축을 대하는 태도와 정신만큼은 이 복잡한 시대에서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나 또한 아버지를 이어 현재도 미래에도 목소리를 내기를 멈추지 않고자 한다.
건축가 유이화
2020-06-02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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