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커버스토리] 평양의 청춘, 그들도 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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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균 기자
수정 2018-06-30 11:07
입력 2018-06-29 20:58

北사진집 출간 日 하쓰자와 아리 작가

8년간 7회 방북… 7개 도시 등 방문
적대감·색안경 벗고 개인의 삶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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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시내의 카페에서 뭔가를 보고 소곤거리고 있는 연인들.  도쿠마서점 제공
평양 시내의 카페에서 뭔가를 보고 소곤거리고 있는 연인들.
도쿠마서점 제공
“무섭고 자유가 없는 전체주의 국가의 이미지가 강한 북한에서도 개개인의 삶의 애환이 있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적대감의 색안경이 씌워진 상태로는 볼 수 없는, 이웃국가로서의 북한을 제 카메라에 담아내고 싶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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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국영항공사인 고려항공에 탑승한 북한인 모녀. 초기 방북 때와 달리 최근에는 기내 촬영이 허용됐다. 도쿠마서점 제공
북한 국영항공사인 고려항공에 탑승한 북한인 모녀. 초기 방북 때와 달리 최근에는 기내 촬영이 허용됐다.
도쿠마서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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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시내의 한 고급 음식점 주차장. 하쓰자와 아리는 “부유층 사람들은 이런 곳에 택시를 타고 와서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고 말했다. 도쿠마서점 제공
평양 시내의 한 고급 음식점 주차장. 하쓰자와 아리는 “부유층 사람들은 이런 곳에 택시를 타고 와서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고 말했다.
도쿠마서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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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과 양주 등을 파는 평양 시내의 바. 최근 들어 이런 형태의 업소들이 크게 늘었다.  도쿠마서점 제공
칵테일과 양주 등을 파는 평양 시내의 바. 최근 들어 이런 형태의 업소들이 크게 늘었다.
도쿠마서점 제공
일본 사진작가 하쓰자와 아리(45)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일본인의 시선을 좀더 긍정적인 것 또는 객관적인 것으로 바꿔 볼 수 없을까, 그것이 북한 방문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2010년 이후 7차례 북한을 다녀온 그는 북한에서 촬영한 사진 수만 장 가운데 일부를 추려 얼마 전 사진집 ‘이웃, 그리고 38도선의 북(北)’을 펴냈다. 지난 28일 서울신문과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하쓰자와는 “8년 전 첫 방문과 올 2월 마지막 방문을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는 북한의 경제적 발전이었다”고 말했다.

→처음 북한에 들어간 건 언제였나.

-2009년 도쿄의 조선총련을 통해 북한 관광을 신청했는데, 1년을 기다린 끝에야 중국 베이징에서 평양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평양외국어대 일본학과에 있는 학생들에게 일본어 서적을 전달하는 단체 사람들 틈에 끼어 갔는데, 일행 중에 사진작가인 나만 카메라 소지가 허용되지 않았다.

→첫 느낌은 어땠나.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는데 “아, 이 사람들도 뿔은 안 달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그 정도로 나 역시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만을 듣고 살아왔던 것이다. 공항에서 일행들이 가져온 책을 검사받고 있는 동안 혼자 나와 담배를 빼물었다. 베이징에서 압수됐기 때문에 라이터가 없었다. 인민복을 입은 10여명의 남자들에게 다가가 불을 빌려 달라고 말을 건 뒤 담배를 같이 피웠다. 나에 대한 감시를 맡았던 북측 안내원이 그런 모습들을 보며 차츰 경계심을 풀어갔던 것 같다.

→사진 촬영은 두 번째 방북 때부터였나.

-그렇다. 2011년 6월 두 번째로 북한에 들어갔다. 1년 전 방북 때 밤에 안내원과 술을 마시며 신뢰를 쌓으려고 노력한 게 어느 정도 먹혀들어 카메라 촬영이 허용됐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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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마서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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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으로서 비교적 자유롭게 북한을 다닌 것 같다.

-평양, 청진, 원산, 회령, 남포, 신의주, 함흥 등 주요 도시를 두루 돌았다. 작은 마을이나 농촌 등도 여러 곳 갔다. 안내원이 주민들에게 ‘이 사람은 우리들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이미지를 좋게 바꾸기 위해 왔다’고 나를 소개하면서 촬영에 도움을 줬다. 그러나 몰래 찍은 사진들도 상당수 있는데, 안내원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가 주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면 그걸로 족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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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시내에서 세그웨이를 타보며 즐거워하고 있는 남성들.  도쿠마서점 제공
평양 시내에서 세그웨이를 타보며 즐거워하고 있는 남성들.
도쿠마서점 제공
→2016년 다시 북한에 들어간 이유는.

-2012년 네 번째 방북을 마치고 그해 12월 ‘이웃, 38도선의 북’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전을 열었다. 그러고서 한참이 흘렀는데, 북한 경제가 국제사회의 제재 속에서도 좋아지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2016년 12월 다시 북한을 갔다.

→방북은 매번 순조로웠나.

-봉변을 당한 적도 있었다. 당장 올 2월 방북 때 입국심사 과정에서 스마트폰을 압수당하고 1시간 동안 억류돼 있었다. 나의 스마트폰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관련된 사진이 있었는데 그걸 문제 삼았다. 솔직히 그때는 오토 웜비어(북한에 억류됐다 사망한 미국인 대학생)처럼 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두려웠다.

→방북이 크게 2개 시기로 구분되는데.

-2010~2012년(4차례 방북)과 2016~2018년(3차례)으로 나눌 수 있을 텐데, 2012년 떠나올 즈음 북한 사회는 사망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애도 분위기로 크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4년 후 다시 갔을 때에는 한층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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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접경도시인 회령의 거리 풍경. 하쓰자와 아리는 “경제 개선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과거보다 촬영을 허용해 준 도시가 늘었다”고 말했다. 도쿠마서점 제공
중국과의 접경도시인 회령의 거리 풍경. 하쓰자와 아리는 “경제 개선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과거보다 촬영을 허용해 준 도시가 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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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을 타고 공동 작업장으로 이동하는 북한 주민들. 도쿠마서점 제공
트럭을 타고 공동 작업장으로 이동하는 북한 주민들.
도쿠마서점 제공


→어떤 변화를 느꼈나.

-평양 거리의 자동차가 4년 전에 비해 얼추 3배 정도 많아 보였다. 특히 북한산 자동차와 택시가 눈에 띄게 늘었다. 백화점에서도 과거 중국산 일색이던 의류 판매대에 북한산이 많이 보였다. 고려항공 기내 촬영이 허용된 것, 고급 음식점에 부유층이 택시를 타고 오는 것, 남자들의 복장이 과거보다 다채로워진 것 등이 과거와 달라진 점들이었다.

→스마트폰은 어느 정도나 보급돼 있었나.

-젊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스마트폰을 갖고 있었다. 그들도 역시 다른 나라처럼 시간이 날 때마다 스마트폰 게임을 즐겼고 수시로 폰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세그웨이(1인용 이동수단)를 타는 사람들도 보였다. 2010년 첫 방북 때에는 못 봤던 카페들도 생겨나 예쁜 여성들이 음료와 케이크를 팔았다. 일본에 없는 ‘낫토(콩을 발효시킨 일본 전통음식) 아이스크림’ 제품도 개발돼 팔리고 있었는데, 맛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왜 사진을 찍나.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차별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 출발점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오키나와와 재일 한국인의 차별 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북한을 다녀온 것 역시 큰 틀에서 같은 맥락이다.

→오키나와 문제에 매우 적극적이라고 들었다.

-미군의 일본 주둔에 따른 고통을 왜 오키나와 주민들만 뒤집어써야 하나.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 민족이 살던 곳이었는데, 본토인들이 정복한 뒤 원주민들을 태평양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그러더니 전쟁이 끝나자 주일미군을 집중적으로 이곳에 주둔시키면서 일본 전체 안전보장의 부담을 일방적으로 전가하고 있다. 이젠 그 부담을 본토로 가져올 필요가 있다.(그는 2013년 말부터 1년 3개월 동안 오키나와에 살면서 현지를 촬영했고, 현재 ‘오키나와 미군 기지를 본토로 가져오는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일본의 대북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일본 정부도, 국민도 어떻게 북한과 마주해야 할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북한을 가상의 적국으로 놓고 때로는 무서운 나라로, 때로는 우스운 나라로 만들며 정치에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의 학생들 중 태반은 100여년 전 한·일 병합에 대해 전혀 모를 만큼 과거사에 대해 무지하다. 학교에서 안 가르쳤든, 학생들이 열심히 안 배웠든 엄연한 현실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역사와 그에 따른 남북 분단의 책임에는 눈을 가리고 있으면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반도 통일이 이뤄질 수 있도록 일본은 모든 책임을 다해야 한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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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사진작가 하쓰자와 아리가 지난 28일 일본 도쿄 미나토구 롯폰기 야마자키 문고에서 7차례에 걸친 방북 및 촬영 과정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오는 8월 15일까지 그의 북한 사진 전시회 ‘이웃, 그리고 38도선의 북’이 열린다. 도쿄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일본인 사진작가 하쓰자와 아리가 지난 28일 일본 도쿄 미나토구 롯폰기 야마자키 문고에서 7차례에 걸친 방북 및 촬영 과정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오는 8월 15일까지 그의 북한 사진 전시회 ‘이웃, 그리고 38도선의 북’이 열린다.
도쿄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하쓰자와 아리는 누구

1973년 프랑스 파리 출생. 일본 조치대 사회학과 졸업. 2002년 전쟁 중인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촬영하고 2013년 오키나와의 슬픔을 담은 작품집을 내는 등 반전(反戰), 소외 등을 주로 다루는 사회참여형 사진작가. 사진집 ‘바그다드 2003’, ‘이웃. 38도선의 북’, ‘오키나와를 말하세요’, ‘이웃, 그리고 38도선의 북’ 등을 펴냈다.
2018-06-3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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