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전원일기] 찻잔에 핀 꽃 행복한 향내 농부의 마술
수정 2017-04-12 00:32
입력 2017-04-11 22:36
<51> 화성 꽃차 농장 ‘농부 아트’
여름이 오고, 깊어질 때마다 기다리는 것이 있다. ‘EBS 국제다큐영화제’(EIDF)가 그것이다. EIDF는 매년 다른 슬로건 아래 전 세계의 다큐멘터리를 감상할 수 있는 축제로, 세계 문화와 소통의 장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지난해에는 ‘다큐로 보는 세상’을 주제로 다양한 다큐멘터리가 소개됐는데 그중 칠레의 ‘티타임’이라는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마이테 알베르디 감독은 자신의 할머니 테레사가 고등학교 졸업 후 60년 넘게 이어 온 티타임을 카메라에 담았다. 각자의 일상과 꿈을 찾아 떠났다가 매월 정기적으로 열리는 티타임을 위해 한곳에 모이는 고교 동창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아름다운 찻주전자와 찻잔, 여러 종류의 차와 비스킷뿐이지만 정작 그들이 나누는 것은 서로의 온기고 인생이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담소를 나누는 가운데, 우정은 깊어지고 각자의 삶과 삶이 연결되며 온 생이 풍미로 가득해진다. 찻주전자에서 찻물이 흐르듯 세월은 흐르고, 흐르는 세월 속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유대감도 깊어지는 것이다. ‘농부 아트’의 김홍희(59) 대표가 꿈꾸는 삶 역시 차와 함께 나누고 이해하고 깊어지는 데 있다.경기 화성시 봉담읍 인근의 한적한 오솔길을 한동안 따라가다 보면 ‘농부 아트’라는 작은 팻말을 단 농장이 나타난다. 길이 다소 멀지만 중간중간 운치 있는 정자와 길게 울며 아는 체를 하는 소들을 만날 수 있어 먼 길이 외려 고맙게 느껴질 정도다. 농장 초입에 엉거주춤 서 있자니 커다란 밀짚모자를 쓴 김 대표가 환하게 웃으며 걸어온다. 표정도 혈색도 맑고 밝아 순간 웬 어린아이인가 싶다가, 꽃 속에서 꽃과 함께 살아서 그런가 싶어진다.
‘농부 아트’가 자리잡은 농장은 김 대표의 아버지가 소를 키우던 곳이다. 1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자리를 잇기 전까지 김 대표는 분당에 살며 중·고등학교에서 공예와 꽃꽂이, 점토 등을 가르쳤다. 김 대표는 마술사의 손이자 농부의 손을 지녔다. 무엇이든 김 대표의 손을 거치면 전혀 다른 사물로 태어났고, 꽃을 기르면서도 모든 과정을 맨손으로 해야 마음이 편하다. 소녀 같은 얼굴과 달리 거칫거칫하고 투박한 손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꽃차를 만드는 일은 새벽부터 시작된다. 벌레가 꼬이기 전에 꽃을 따야 신선하고 건강한 차를 만들 수 있어서다. 꽃을 따는 데도 보통 주의를 기울이는 게 아니다. 꽃 모양이 상하지 않아야 예쁜 꽃차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꽃을 따고 난 후에는 맑은 물에 세척하고, 꽃에 따라 감초물이나 소금물 등에 훈증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수분이 적당히 빠지면 꽃을 덖고 수분 체크를 한 뒤에 향매김을 한다. 향매김은 잠재우기라고도 하는데 자기 향이 자기 몸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밀폐 보관하는 것을 이른다. 꽃처럼 꽃차를 만드는 과정에 사용되는 말도 예쁘고 아름답다. 향 매기는 과정이 끝나고 나면 고온에서 한 번 더 덖은 후 용기에 담아내는데, 꽃을 따서 용기에 담기까지 꼬박 이틀이 걸린다. 그동안에는 충분히 잘 수도 없고 여유를 부릴 수도 없다.
“꽃을 따고 이틀 동안은 꼬박 꽃에 매달려 있어야 해요. 꼭 애기를 키우는 것 같죠.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엉뚱한 짓을 하거든요. 한 송이 만들려면 손이 수십 번은 가는데 잠깐 사이 망가진 꽃을 보면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이 무너져요.”
#눈의 피로엔 메리골드·소염효과 민트차
같은 꽃으로 차를 만들어도 누구의 손을 탔느냐에 따라 맛과 향과 빛깔이 다르다. 김 대표가 만든 꽃차는 빛깔부터 남다르다. 꽃색이 그대로 살아 있어 생화라고 해도 믿길 정도다. 뿐만 아니라 꽃향도 아찔하고 맛도 그윽하다. 배워서 하는 것과 경험으로 체화시켜서 하는 것이 달라서일 테다.
“처음 이곳에 내려왔을 때는 소를 키웠어요. 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그대로 물려받은 거죠. 그러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소 값이 폭락해서 80마리를 헐값에 처분했어요. 정말 허탈하더라고요. 한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 보자 마음먹었지요. 농장에 꽃을 심고 꽃차를 만들기 시작한 거죠. 그게 3년 전이었는데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엄청 겪었어요. 만들어 놓고 보면 색이 죽어 있고, 색이 살았나 싶으면 비린 맛이 나기 일쑤였죠.”
“메리골드차를 드셔 보세요. 루테인 성분이 많아서 눈이 피로한 분들에게 좋거든요. 3년 동안 이 차를 꾸준히 드시고 안경을 벗었다는 할머니도 계세요.”
#꽃 채취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해
투명한 주전자에서 주황빛 메리골드가 활짝 피어난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의 피로가 풀리는 듯하다. 메리골드뿐만이 아니다. 마른 꽃들이 물을 만나, 붉고 푸르고 노란 꽃들로 만개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게 웬 호사인가 싶다. 차 마시는 일은 눈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알 것 같다. 차 마시는 일은 기다림을 견디는 일이기도 하다. 물을 끓이고, 알맞은 온도로 식히고, 찻물이 우러날 때까지, 차를 마중하기 위해 들이는 시간을 온전히 견뎌야 한다. 패스트푸드에 익숙해 잠깐의 시간도 참지 못했던 그간의 모습이 찻물에 떠올랐다.
메리골드차가 눈의 피로에 좋다면 목련차는 비염과 감기에 좋고, 맨드라미차는 여성에게 권할 만하다. 자궁염이나 대하증, 생리통에 큰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신경성 두통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면 국화차를 마시는 것도 좋겠다. 국화차는 기억력 감퇴와 불면증에도 뛰어난 효과를 보인다. 민트차에 소염, 항균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 대표가 만드는 꽃차는 종류를 헤아릴 수 없다. 7000평 규모의 밭에 30종 이상의 꽃을 기르는 데다가 산으로 들로 꽃 나들이를 가는 날도 많다. 갈 때마다 김 대표의 바구니는 갖가지 꽃들로 가득 찬다.
“모를 때는 이건 풀이야, 꽃이야, 하고 말았는데 알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요. 볼 때마다 가슴이 뛰어요. 이 꽃으로 차를 만들면 얼마나 예쁠까, 이건 누구에게 주고 저건 또 누구에게 줘야지, 하는 생각에 마냥 행복해져요.”
김 대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 꽃차뿐은 아니다. 2013년 한국농수산대에서 약초 최고경영자(CEO) 과정을 이수한 후에는 약선차 강좌도 열고 있다.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약재와 꽃을 이용해 자신의 체질에 맞게 차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고, 함께 만들어 차 마시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약선차는 한방과 관련된 만큼 짬짬이 한의학 공부도 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분야이든, 시작한 이상 완벽을 기울이려는 김 대표의 노력이 엿보인다.
앞으로의 꿈도 만만치 않다. 꽃차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견과류와 꽃식초도 본격적으로 생산할 계획이다. 꽃식초는 꽃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한 알코올을 천연 발효해 만든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풍미가 좋고 해독, 피로물질 분해, 동맥경화 예방, 콜레스테롤 억제 등 여러 효능을 지니고 있어 수요가 예상된다. 견과류의 경우 꽃가루를 입혀 갖가지 색을 만들어내는데 견과류가 지닌 본래의 고소함에 더해 꽃 특유의 향이 묻어나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
#문화체험 공간 만들어 꽃구경 명소로
농부 아트의 진입로에 배롱나무를 심고 농장을 짜임새 있게 가꿔 체험농장도 운영할 예정이다. 체험농장의 한편에는 차와 문화가 만나는 카페도 들어선다. 김 대표는 자신의 서재를 통째로 옮겨, 차를 즐기면서 책도 읽을 수 있게 하고, 주말에는 전시회나 음악회를 열어 문화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꽃차 생산으로 연 매출이 5000만원 정도이지만 김 대표의 사업 계획이 이뤄진다면 매출액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화성에는 갈 만한 곳이 드물어요. 조용히 앉아서 사색할 곳도, 편하게 대화를 나눌 곳도 찾기 힘들죠. 문화 생활을 즐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여기 와서 꽃구경도 하고, 꽃도 따고, 차도 만들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무엇보다 마음 놓고 쉬었다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 대표가 꿈꾸는 공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향기로운 꽃차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인생과 인생이 연결되는 곳, 차와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곳, 그래서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힘을 키우게 되는 곳. 60년 넘게 매달 티타임을 가졌던 테레사의, 죽음을 앞둔 편지가 김 대표의 꿈과 겹친다. 그 꿈이 테레사의 편지와 같기를 기도하며 손에 든 찻잔에 봄이 한가득이다.
‘세상은 변한 게 없고 우리가 아름답게 나눴던 삶도 그대로 남아 있어. 슬퍼하지도 격식을 차리지도 마. 우스운 얘기를 하며 똑같이 웃어 줘. 기운 차리고 내 생각도 해 줘. 북받치는 감정, 슬픔은 필요 없어. 보이지 않는다고 내가 너희 인생에서 사라지겠어? 나는 멀리 간 게 아니야. 길만 건너갔지. 너희를 기다릴게. 슬퍼하지 마.’
■글쓴이 소설가 진연주
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방’(房)으로 등단. 2015년 문학동네에서 장편소설 ‘코케인’ 출간.
2017-04-1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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