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헌책처럼, 가을처럼
황수정 기자
수정 2024-10-02 03:53
입력 2024-10-02 03:53
오래된 책을 인터넷을 뒤져 손에 넣는 즐거움. 헌책 읽는 맛이 제법이다.
우정과 동치미는 묵혀야 제맛이고 책만은 새것이라야 한다고 고집했더랬다. 옛 문사들이야 손때 묻은 책의 운치를 자랑하고는 했다. 작가 이태준은 “먼지를 털고 겨드랑 땀내 같은 것을 풍기는” 묵은 책들을 글로써 예찬했다. 그렇게 연륜이 깊은들 새 잉크의 쨍한 맛을 당해 낼까 싶었다.
삶의 묘미를 삶의 모퉁이에서 만난다. 세월을 돌다 온 헌책에 덤이 붙어 온다. 책갈피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은 마른 단풍잎. 늦가을 어느 오후에 누군가의 상념이 저리 붉었을까. 꼼짝없이 박제된 하루살이 한 마리. 깊은 여름 어느 밤에 누가 잠 못 들어 뒤챘을까. 그 누가 그어 놓은 밑줄에 오래 눈이 간다.
군생각들이 성가시지 않다. 손때로 모서리 둥글어진 책을 읽으면 밀린 잠이 밀려온다. 돌아온 나그네의 긴 잠처럼. 누워 읽다 깜박 졸음에 콧등이 찍혀도 아무 탈 없다. 그저 괜찮다.
시간을 겪어 제 몸 둥글린 헌책처럼, 여물어 순해지는 가을 열매처럼. 둥글둥글하게, 구수하게.
황수정 수석논설위원
2024-10-02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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